‹ 목록
제22화영원한 태왕
제22화

영원한 태왕

광개토대왕 ④ · 414년
아래로 스크롤 ↓
🎧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400년,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왜군으로 가득 찼던 신라의 도읍을 구하고, 달아나는 왜를 임나가라의 종발성까지 쫓게 했다. 고구려에 볼모로 와 있던 신라의 실성은 401년 고향으로 돌아가 이듬해 왕이 되었고, 이번에는 내물왕의 아들들을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그리고 1946년, 경주의 한 신라 무덤에서 광개토대왕의 이름을 새긴 고구려의 청동 그릇이 나왔다.

등장인물

장수왕광개토대왕의 맏아들.
414년, 아버지의 비석을 세운다
거련어린 날의 장수왕.
409년 태자가 된다
광개토대왕고구려의 왕 담덕.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난다
모용희후연의 왕.
요동성과 목저성을 친다
동부여 사람410년, 태왕의 군대를
따라 고구려로 온다
수묘인 아이태왕의 무덤을 지키러
남쪽에서 온 집의 딸

414년 가을,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 가까운 들판에 돌을 쪼는 소리가 울렸다.

새 왕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위해 세운 비석에, 석공들이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卅有九
장수왕광개토대왕의 맏아들 · 고구려의 새 왕

그날, 남쪽 먼 곳에서 온 가족들이 무덤 곁에 짐을 풀었다. 태왕의 무덤을 지킬 ‘수묘인’ 집안들이었다.

烟二穢穢合墓人國合國十烟韓舊爲一韓墓十烟國韓穢爲二家一民城爲一新國三烟家烟墓合二穢二十烟守烟十十烟三穢人三二三國看爲穢韓看烟穢墓二墓舊國三韓國守看守合合二三二家家三城家三爲烟二人舊家韓十看看一舊二三守一三爲國國爲墓一民穢穢烟守二十合一韓一二守國看墓烟城舊民民韓合合爲人守墓烟看二城穢二城二
장수왕이 돌이
궁금하냐?
수묘인의 딸네…!
뭐라고 새겨요?

비석은 시조 추모왕의 이야기로 시작해, 태왕의 일생을 적었다.

恩恩澤澤洽洽于于皇皇天天威威武武振振被被四四海海掃掃除除庶庶寧寧其其業業國國富富民民殷殷五五穀穀豊豊熟熟昊昊昊天天天不不不弔弔弔卅卅卅有有有九九九宴宴宴駕駕駕棄棄棄國國國以以甲甲寅寅年年九九月月廿廿九九日日乙乙酉酉遷遷就就山山陵陵於於是是立立碑碑銘銘記記勳勳績績以以示示後後世世
장수왕내 아버지의
이야기다.
장수왕…서른아홉.

비석은 태왕의 마지막을 이렇게 적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서른아홉에 나라를 버리고 떠나셨다.

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 광개토대왕릉비

열네 해 전, 400년.

그해 고구려는 남쪽으로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했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후연이 쳐들어왔다.

400년 2월, 후연의 왕 모용성은 ‘고구려 왕이 예를 갖추지 않는다’며 몸소 3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모용희앞장선 후연의 장수 · 뒷날 후연의 왕
모용희신성과 남소를
쳐라!

후연은 신성과 남소 두 성을 빼앗고, 700여 리 땅을 차지했다.

고구려 사람 5천여 집이 후연 땅으로 끌려갔다.

아이엄마,
우리 집은…?
전령신성과 남소가 떨어지고,
백성 5천 집이 끌려갔습니다!
광개토대왕땅은 다시
찾으면 된다.
…끌려간 사람은
어찌 찾겠느냐.
거련태왕의 맏아들 · 일곱 살 무렵

402년, 이번에는 고구려군이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을 쳤다.

고구려 장수숙군성을
쳐라!

성을 지키던 후연의 평주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404년, 남쪽 대방 땅에 왜가 쳐들어오자 태왕이 몸소 나가 크게 무찔렀다고 비석은 적었다.

그해 11월, 고구려군은 다시 후연을 쳤다.

이듬해 정월, 이번에는 후연이
요동성으로 몰려왔다.

405년 정월, 후연의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에워쌌다. 성은 곧 떨어질 듯했다.

모용희후연의 왕
모용희먼저 오르지
마라!
모용희성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
짐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갈 것이다!

『삼국사기』는 모용희가 이렇게 명령했다고 적었다.

그 사이, 성안에서는 단단히 채비를 갖추었다.

고구려 장수적이 기다려 준다!
무너진 곳을 메워라!

후연군은 끝내 요동성을 빼앗지 못하고 돌아갔다.

고구려 군사요동성을
지켰다!
거련황후랑 가마 타고 들어가려다
졌대요!
광개토대왕웃을 일이
아니다.
왕이 교만하면,
그 값은 군사들이 치른다.

406년 12월, 거란을 치러 간 모용희는 거란의 많은 군사에 겁이 나 돌아가려 했지만, 함께 온 황후가 듣지 않았다.

모용희저렇게
많다니…
짐수레를 버려라!
고구려를 친다!

모용희는 가벼운 군사로 3천여 리를 달려 고구려로 향했다.

군사와 말은 지치고 얼어, 죽은 이가 길에 줄을 이었다.

목저성을 친 후연군은, 이번에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고구려 군사또 물러간다!

407년, 후연에서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임을 당하고, 고운이 새 왕이 되었다. 이 나라를 흔히 북연이라 부른다.

『삼국사기』는 고운의 할아버지가 고구려의 한 갈래였다고 적었다.

408년 3월, 태왕은 북연에 사신을 보내
한 핏줄의 정을 나누었다.

409년 4월, 태왕은 맏아들 거련을 태자로 세웠다.

거련태자 · 열여섯 살 무렵, 뒷날의 장수왕
광개토대왕오늘부터 너는
고구려의 태자다.

『삼국사기』는 거련이 체격이 크고, 뜻과 기개가 호방했다고 적었다.

고구려후연(407년부터 북연)동부여(위치는 여러 설)거란백제서해동해요하압록강두만강국내성고구려의 도읍평양성고구려의 큰 성용성후연의 도읍400 신성·남소를 빼앗김402 숙군성404 대방 땅의 왜405 요동성406 목저성410 동부여성의 자리는 대부분 짐작이고,동부여의 위치도 여러 설이 있다고구려군후연군

열 해 남짓, 태왕의 군대는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으로 움직였다.

410년, 태왕은 몸소 군사를 이끌고 동부여로 향했다.

비석은 동부여가 추모왕의 옛 속민이었는데,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적었다.

거련동부여는 어떤
나라입니까?
광개토대왕추모왕 때부터
우리 백성이던 나라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도읍 여성에 이르자, 동부여는 온 나라가 놀라 엎드렸다.

동부여 사람들추모왕의 옛 속민이라던 나라
동부여의 우두머리고구려의 태왕께
엎드립니다…!
광개토대왕칼을
거두어라.
거련싸우지 않고도…
이겼다.

비석은 ‘태왕의 은혜가 널리 미쳤다’고 적었다. 태왕은 곧 군사를 돌렸다.

돌아가는 고구려군의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거련어찌하여 우리를
따라오시오?
동부여의 우두머리태왕의 덕을
따르려 하오.

비석은 태왕을 사모해 관군을 따라온 이들로, 미구루 압로·비사마 압로 등 다섯 압로를 새겼다.

비석은 태왕이 평생 쳐서 깨뜨린 것을 이렇게 셈했다.

성 예순넷, 마을 1,400.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 광개토대왕릉비

태왕은 살아 있을 때 이렇게 일렀다고, 비석은 적었다.

광개토대왕선왕들께서는
멀고 가까운 옛 백성에게
무덤을 지키게 하셨다.
그런데 옛 백성이 점점
가난하고 약해질까 걱정이구나.
거련…아버님.

내가 죽은 뒤에는, 내가 몸소 싸워 데려온
한·예 사람들로 무덤을 지키게 하라.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 광개토대왕릉비

‘한·예’는 태왕이 싸워 얻은 남쪽 땅들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광개토대왕오늘부터 너는
고구려의 태자다.

412년, 광개토대왕이 세상을 떠났다. 서른아홉 살이었다.

태자 거련이 왕위를 이었다.

뒷날 아흔여덟 해를 살아
‘장수왕’이라 불리게 되는 왕이다.

414년 9월 29일, 태왕을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고구려 사람들은 장례 날 북을 치고 춤추며 음악을 울려, 죽은 이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 돌을 일으켜 세웠다.

당겨라!
하나, 둘, 셋!

태왕의 말대로, 데려온 한·예 사람 220집이 무덤을 지키게 되었다.

장수왕은 그들이 법도를 모를까 하여 옛 백성 110집을 더했다. 모두 330집이었다.

옛 백성무덤을 지켜 온 고구려 사람
노인무덤은 이렇게
쓸어야 하오.

비석에는 무덤을 지킬 집들이 어느 고장에서 왔는지, 몇 집인지가 하나하나 새겨졌다.

‘아단성·잡진성 두 곳에서 열 집을 간연으로 삼는다’는 글이었다.

城城國國烟烟一一看看烟烟三三城城二二家家爲爲看看烟烟家家爲爲看看烟烟阿阿阿旦旦旦城城城雜雜雜珍珍珍城城城合合合十十十家家家爲爲爲看看看烟烟烟城城韓韓九九家家爲爲看看烟烟城城四四家家爲爲看看烟烟
아이아단성…!
우리 고향 이름이에요!
아버지…다시는
못 갈 고향이지.
墓舊新城守人民爲合合舊城二守家墓人民新烟穢墓城一城烟國墓看人烟三穢看墓人合家家穢國烟城城合二爲烟國穢十二爲爲看舊人城爲三十穢三三一國十民家家二國新守穢民人看烟烟國家一家新民人烟墓看爲合三穢合韓城三舊家國墓守守國新韓穢十看新爲爲城民三看穢爲爲國爲新人穢二守合國一墓二看十烟韓看國人烟韓人人十墓一舊穢民韓三家舊舊家墓三新十民人韓舊墓家國看爲國國爲二舊十韓墓三韓墓看二一民看城穢國穢十穢舊墓十一民韓二十舊二十一新家民墓人穢穢城爲看守韓新穢家合烟穢爲新爲穢舊韓國十一人看看韓城新一
장수왕이 돌이 서 있는 한,
너희 고향의 이름도 남는다.

비석에는 수묘인을 사고팔지 못하게 하는 법도 새겼다. 판 사람은 벌하고, 산 사람은 무덤을 지키게 했다.

광개토대왕…끌려간 사람은
어찌 찾겠느냐.

414년 가을, 스무 살 남짓한 장수왕은 아버지의 비석 곁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그 뒤로 1,600년이 넘도록, 비석은 그 자리에 서 있다.

태왕이 한 일과,
무덤을 지킨 사람들의
고향 이름을 품은 채.

제22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후연과 밀고 밀린 일곱 해

    『삼국사기』에 따르면 400년 2월 후연의 왕 모용성이 ‘고구려 왕의 예가 거만하다’며 3만 군사로 신성·남소 두 성을 빼앗고 700여 리 땅을 차지해 5천여 집을 옮겨 갔어요. 고구려는 402년 숙군성, 404년 다시 후연을 쳤고, 405년 정월 요동성은 무너지기 직전이었지만 ‘먼저 오르지 말고 성을 평평하게 깎은 뒤 황후와 가마를 타고 들어가겠다’는 모용희의 명령 덕에 채비할 틈을 얻어 끝내 지켜 냈어요. 406년 12월에는 3천여 리를 달려온 후연군이 목저성에서 물러났고, 407년 후연이 무너진 뒤 고구려는 북연의 왕 고운과 한 겨레의 정을 나누었어요. 이 싸움들은 중국 역사책(『진서』·『자치통감』)에도 실려 있고, 요동성은 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으로 봐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 비석에만 남은 동부여 원정

    광개토대왕릉비 영락 20년(410) 조는 동부여가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배반하고 조공하지 않자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가, 도읍 ‘여성’에 이르자 온 나라가 놀라 엎드렸다고 적었어요. 이어 왕을 사모해 관군을 따라온 이들로 미구루 압로·비사마 압로 등 다섯 ‘압로’를 새겼는데, 압로는 동부여의 벼슬 이름이나 무리의 이름으로 봐요. 동부여의 자리는 두만강 유역(옛 북옥저 땅, 지금의 훈춘 일대)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함경도의 동예와 같은 나라로 보는 옛 견해 등도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이 원정이 없어요. 영락 17년(407) 조에도 보병·기병 5만을 보낸 싸움이 있는데, 상대의 이름이 지워졌는데, 백제로 보는 견해가 많고 후연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3. 서른아홉, 그리고 한 해의 차이

    비문은 왕이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서른아홉에 세상을 떠났다고 적었으니 412년의 일이고, 『삼국사기』는 413년 10월이라고 적어 한 해 늦어요(19화 노트). 비석에 따르면 장례는 두 해 뒤인 414년 9월 29일이었는데, 『수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죽은 이를 집 안에 빈소를 차려 3년 동안 모신 뒤 좋은 날을 골라 장사 지내고, 장례 때는 북을 치고 춤추며 음악을 울려 보냈다고 적었어요. 장수왕이 98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삼국사기』를 따르면 거련은 394년 무렵에 태어나, 409년 태자가 될 때 열여섯 살 무렵이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 『수서』 고려전
  4.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 · 중국 지린성 지안

    광개토대왕릉비

    높이 6.39m의 네모난 응회암 기둥 네 면에 44줄, 1,775자 안팎을 새겼고, 지금은 140자 남짓을 읽을 수 없어요. 내용은 추모왕의 건국 이야기와 왕의 일생, 395~410년의 싸움, 무덤을 지킬 집들의 목록 세 부분이에요. 고구려가 망한 뒤 잊혔다가 1880년 무렵 다시 알려졌는데, 덮인 이끼를 불로 태워 없애다 돌에 금이 가기도 했어요. 1883년 무렵 일본 육군 장교가 글자를 본뜬 본을 일본으로 가져간 뒤 여러 탁본이 퍼졌고, 지금은 사방이 유리로 된 비각 안에 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5. 광개토대왕릉비에 새긴 글자광개토대왕릉비에 새긴 글자(부분) · 중국 지린성 지안

    무덤을 지킨 330집

    비석의 끝부분에는 무덤을 지킬 ‘수묘인’ 330집(국연 30집, 간연 300집)이 고장별로 적혀 있어요. 왕이 살아 있을 때 ‘옛 백성이 가난하고 약해질까 걱정되니, 내가 몸소 데려온 한·예 사람으로 무덤을 지키게 하라’고 했다는 말에 따라 한·예 사람 220집을 두고, 법도를 모를까 하여 옛 백성 110집을 더했대요. 또 수묘인을 사고팔지 못하게 해, 판 사람은 벌하고 산 사람은 무덤을 지키게 했어요. 국연과 간연이 어떻게 달랐는지는 여러 설이 있어요. 아이가 찾은 ‘아단성’은 396년에 빼앗은 백제의 성 가운데 하나로, 서울 아차산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어요(충북 단양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수묘인 연호 조)
  6. 태왕릉 (중국 지안)태왕릉 · 중국 지린성 지안

    태왕릉과 장군총, 누구의 무덤일까

    비석에서 남서쪽으로 300~400m 떨어진 태왕릉은 ‘태왕의 능이 산처럼 편안하고 높은 산처럼 굳건하기를’ 비는 글자를 새긴 벽돌이 나와 붙은 이름이에요.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청동 방울도 나와,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비석에서 북동쪽으로 1.7km쯤 떨어진 장군총은 한 변 30m 남짓, 높이 13m의 7층 돌무지무덤인데, 이쪽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자도 많고, 장수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태왕릉 · 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
  7. 상상으로 그린 장면

    수묘인 아이와 아버지, 옛 백성 노인, 장수왕이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틀은 상상이에요. 어린 거련이 400년과 405년에 아버지 곁에 있던 장면, 410년 동부여 원정에 따라간 장면도 기록에 없어요. 인물들이 주고받는 말도 기록을 바탕으로 지어냈고, 태왕의 유언은 비문의 말을 풀어 썼어요. 후연 군사의 깃발 빛깔과 모용희의 차림, 요동성 성벽이 허물어진 모습, 가마·상여·동부여 마을의 모습, 비석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도 짐작으로 그렸어요.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제23화 · 평양으로

427년, 장수왕은 대대로 도읍이던 국내성을 떠나 대동강 가의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다. 아흔여덟 해를 산 왕의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