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제19화열여덟 살의 왕
제19화

열여덟 살의 왕

광개토대왕 ① · 391년
아래로 스크롤 ↓
🎧 소리와 함께 보면 더 생생해요.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지난 이야기

백제 근초고왕은 369년 치양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371년 평양성을 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쓰러뜨렸으며, 가지가 일곱 달린 칼 칠지도는 바다를 건너 왜로 갔다. 그 무렵 고구려에서는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이 나라를 추슬렀고, 그 뒤를 이은 아우 고국양왕은 386년 아들 담덕을 태자로 세웠다.

등장인물

담덕고구려의 왕.
열여덟 살에 왕이 된다
아신왕백제의 새 왕.
관미성을 되찾으려 한다
진사왕백제의 왕.
아신의 숙부
진무백제의 장수.
아신왕의 외삼촌

414년,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 가까이에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 돌비석이 섰다.

二九登祚
장수왕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공을 새겨 세운 비석, 광개토대왕릉비다.

비석은 시조 추모왕(주몽)의 이야기로 시작해, 이렇게 이어진다.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二九登祚 號為永樂太王 — 광개토대왕릉비

391년, 고국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담덕이 왕위에 올랐다.

담덕고국양왕의 아들 · 열여덟 살

왕은 해를 세는 이름(연호)을 ‘영락’이라 했다. 사람들은 그를 ‘영락태왕’이라 불렀다.

『삼국사기』는 그가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뜻이 크고 활달했다고 적었다.

담덕할아버님께서 평양성에서 쓰러지신 지, 스무 해.
이제 고구려가 남쪽으로 간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은 371년 평양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392년 7월, 담덕은 4만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북쪽 땅으로 내려갔다.

담덕남쪽으로! 백제로 간다!

고구려 왕 담덕이 4만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백제의 도읍 한성에 닿았다.

진사왕백제의 왕 · 아신의 숙부
신하어서 군사를 내어 막으소서!
진사왕…군사를 귀신같이 부린다는, 그 젊은 왕인가.

진사왕은 담덕이 군사를 잘 부린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했다.

석현성을 비롯한 열 곳 남짓한 성과 한강 북쪽의 여러 마을이, 고구려 손에 들어갔다.

고구려백제서해동해압록강대동강한강(한수)예성강임진강국내성고구려의 도읍평양성고구려의 큰 성한성백제의 도읍392년 7월 · 4만 군사석현성(추정)석현성 등 10여 성관미성 ?교동도로 보는 설 등성의 자리는 대부분 알 수 없고관미성의 위치도 여러 설이 있다

9월, 담덕은 말머리를 돌려 북쪽의 거란을 쳤다.

거란 사람 남녀 500명을 사로잡았다.

거란 땅에는 잡혀간 고구려 백성들이 살고 있었다.

담덕고구려 사람들이여, 고향으로 가자!
늙은 백성고구려 말이다…! 우리 임금님이 오셨다!

담덕은 그들을 불러 달래어, 1만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할머니이제 고향으로 가는 거란다.
손자할머니, 고향이 뭐예요?

10월, 고구려군은 바닷가의 관미성 앞에 이르렀다.

고구려 장수새가 아니고서야 저 성엔 못 오릅니다.
담덕길이 하나뿐이라면, 그렇겠지.

사면이 깎아지른 절벽이고, 바닷물이 빙 둘러싼 성이었다.

담덕일곱 길로 나누어, 한꺼번에 쳐라!

왕은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성을 몰아쳤다.

공격은 스무 날 동안 이어졌다.

고구려 군사성벽이 무너진다!

스무 날 만에, 관미성이 떨어졌다.

담덕이제 백제의 북쪽 문이 열렸다!

그 무렵, 진사왕은 도읍을 떠나 구원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전령전하! 관미성이… 떨어졌습니다!
진사왕……

왕은 열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진사왕의 뒤를 이어, 침류왕의 맏아들 아신이 왕위에 올랐다.

아신왕백제의 새 왕 · 매와 말을 좋아했다

아버지 침류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신이 어려서, 숙부 진사가 먼저 왕이 되었다고 한다.

393년 정월, 아신왕은 외삼촌 진무를 좌장으로 삼아 군사의 일을 맡겼다.

진무아신왕의 외삼촌 · 좌장
아신왕외숙께 나라의 군사를 맡기겠소.

진무는 침착하고 굳세며 큰 꾀가 있어, 사람들이 잘 따랐다.

아신왕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요.
그 성을 고구려에 빼앗겼으니, 과인은 원통하기 그지없소.

393년 8월, 아신왕은 진무를 불렀다.

아신왕경은 마음을 다해, 이 치욕을 씻어 주시오!

진무는 1만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떠났다.

석현 등 다섯 성을 되찾으려,
먼저 관미성을 에워쌌다.

진무는 몸소 군사들 앞에 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썼다.

진무물러서지 마라! 관미성을 되찾는다!

성안의 고구려 군사들은 성을 굳게 지켰다.

그러나 군량을 나르는 길이 이어지지 못했다.

백제 군사쌀이… 다 떨어졌습니다.
진무…돌아간다.

진무는 끝내 군사를 돌렸다. 관미성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깃발이 나부꼈다.

394년 7월, 백제군이 다시 북쪽으로 올라왔다.

담덕은 몸소 날랜 기병 5천을 이끌고 맞받아쳤다.

수곡성 아래에서 진 백제군은
밤을 틈타 달아났다.

8월, 고구려는 나라 남쪽에 일곱 성을 쌓아 백제에 대비했다.

담덕백제 왕은 다시 올 것이다.

395년 2월, 서북쪽 하늘에 꼬리별이 나타났다가 스무 날 만에 사라졌다.

아신왕하늘이 무엇을 알리는 것인가…
…그래도, 관미성은 되찾아야 한다.

8월, 아신왕은 진무 등에게 다시 고구려를 치게 했다.

패수 가에는 고구려 왕 담덕이 몸소 7천 군사를 이끌고 진을 치고 있었다.

담덕고구려 왕
진무고구려 왕이… 몸소 나왔다.
담덕백제군이 강을 건너게 두지 마라!

백제군은 크게 졌다.

죽은 이가 8천에 이르렀다.

11월, 아신왕은 패수의 싸움을 갚으려고, 몸소 7천 군사를 이끌고 한수를 건넜다.

아신왕이번에는, 과인이 간다.

청목령 아래에 이르렀을 때, 큰 눈이 쏟아졌다.

아신왕경은 마음을 다해, 이 치욕을 씻어 주시오!

얼어 죽는 군사가 많았다.

왕은 군사를 돌려 한산성으로 돌아와, 지친 군사들을 위로했다.

아신왕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전하…

395년 겨울. 북쪽의 왕과 남쪽의 왕은, 같은 눈을 맞고 있었다.

담덕이제 고구려가 남쪽으로 간다.
아신왕관미성은 되찾아야 한다.

관미성을 되찾겠다는 아신왕의 뜻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396년,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선다.

제19화 끝

역사 노트

이야기 속 장면은 이런 기록과 유적을 바탕으로 그렸어요.

  1. 광개토대왕릉비광개토대왕릉비 · 중국 지린성 지안

    391년일까, 392년일까

    광개토대왕릉비는 왕이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二九登祚)’ ‘영락태왕’이라 불렸다고 적었어요. 비문의 영락 5년이 을미년(395)이니 왕이 된 해는 391년이에요. 그런데 『삼국사기』는 왕의 첫해를 392년으로 셈해 비문보다 한 해씩 늦어서, 『삼국사기』가 왕이 된 해의 일로 적은 백제 10성·거란·관미성 싸움을 391년의 일로 보는 견해도 많아요. 이 화는 왕이 된 해는 비문을, 싸움이 벌어진 해는 『삼국사기』를 따랐어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2. 파주 오두산성파주 오두산성 · 관미성으로 보는 곳 가운데 하나

    관미성은 어디였을까

    『삼국사기』는 관미성이 ‘사면이 깎아지르고 바닷물이 둘러싼’ 성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강과 임진강이 바다로 나가는 어귀의 섬 강화 교동도로 보는 설, 두 강이 만나는 곳의 파주 오두산성으로 보는 설, 예성강 어귀로 보는 설 등이 있어요. 어느 쪽이든 백제의 도읍 한성으로 드나드는 물길을 지키는 요충지였어요. 비문이 396년에 빼앗았다고 적은 58성 가운데 ‘각미성’을 관미성과 같은 성으로 보기도 해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아신왕
  3. 사냥터에서 세상을 떠난 왕

    『삼국사기』는 진사왕을 ‘굳세고 용감하며 총명하고 지략이 많은’ 사람이라 하면서도, 담덕이 쳐들어오자 나가 막지 못했고 관미성이 떨어진 그달에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다가 이듬달 그곳 행궁에서 죽었다고만 적었어요. 『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왜에 무례하게 굴어 죽임을 당하고 아신(아화)이 왕으로 세워졌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왜의 입장에서 쓴 이 이야기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사냥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왕위를 둘러싼 정변으로 보는 학자도 있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아신왕 · 『일본서기』
  4. 서울 풍납동 토성 — 아파트 사이로 남은 백제의 성벽풍납토성 · 서울 송파구

    아신왕과 외삼촌 진무

    아신왕은 침류왕의 맏아들로, 한성의 별궁에서 태어날 때 신비한 빛이 밤을 밝혔다고 하고, 자라서는 매와 말을 좋아했대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385) 어려서 숙부가 왕이 되었다고 하지만, 394년에 맏아들 전지를 태자로 세운 것을 보면 그리 어리지 않았을 거라는 의문도 있어요. 외삼촌 진무는 393년 좌장이 되어 군사를 맡았고 398년에는 병관좌평이 되었는데, 아신왕이 다스린 도읍 한성은 오늘날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몽촌토성 일대로 봐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아신왕
  5. 패수와 청목령, 그리고 석현성

    이 무렵 두 나라가 맞선 패수는 황해도의 예성강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아신왕의 군사가 눈을 만난 청목령은 개성 서북쪽 고개로 짐작해요. 백제는 373년 청목령에 성을 쌓았고, 386년에는 청목령에서 북쪽 팔곤성, 서쪽 바다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을 쌓았어요. 담덕이 처음 빼앗은 석현성도 개성 가까운 개풍 땅으로 보는 견해가 있어, 이 일대가 두 나라가 거듭 맞부딪친 싸움터였어요.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아신왕
  6. 비석이 적은 395년

    광개토대왕릉비에는 392~395년 백제와 싸운 일이 따로 나오지 않아요. 396년 조에 적은 58성에 392년부터 빼앗은 성들까지 합쳐 적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아요. 395년(영락 5년)의 일로는 왕이 몸소 비려(패려라고도 읽어요)를 쳐서 염수 가에서 세 부락의 600~700영(營)을 깨뜨리고 소·말·양을 셀 수 없이 얻은 뒤, 국토를 둘러보고 사냥하며 돌아왔다고 적었어요. 비려는 거란의 한 갈래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 『삼국사기』의 392년 거란 정벌(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데려온 일)은 비문에는 없는 이야기예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7. 태왕릉 (중국 지안)태왕릉 · 중국 지린성 지안

    ‘광개토’라는 이름

    비문은 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 불러요. ‘국강상’은 무덤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할아버지 고국원왕도 『삼국사기』에 ‘국강상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어요. 뒷부분은 흔히 ‘땅의 경계를 널리 열고(광개토경) 나라를 평안하게 한(평안) 훌륭한 큰 왕(호태왕)’으로 풀이해요. 살아 있을 때는 연호를 따서 ‘영락태왕’이라 불렸어요. 비석 가까이 있는 큰 돌무지무덤 태왕릉은 ‘태왕의 능이 산처럼 편안하기를’ 비는 글자가 새겨진 벽돌이 나와 붙은 이름인데,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요(장군총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요).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이번 화의 열쇠말

다음 화

제20화 · 아신왕의 맹세

396년, 광개토대왕은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바닷길로 백제를 친다. 무너지는 성 쉰여덟 곳, 아리수 건너 에워싸인 백제의 도성 — 궁지에 몰린 아신왕은 어떤 맹세를 하게 될까.

사진 출처

이 웹툰의 삽화는 모두 새로 그린 것이며, 등장인물의 이름과 대사는 역사적 사실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상상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연대와 해석은 학계의 일반적인 설명을 따랐고, 의견이 갈리는 부분은 역사 노트에 밝혀 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