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다
장면마다 바람·모닥불·강물 소리가 바뀌고, 이야기 흐름을 따라 음악도 달라져요.
호동 왕자의 부탁으로 낙랑 공주는 적이 오면 스스로 운다는 북을 찢고 뿔피리를 부수었다. 낙랑은 고구려에 항복했지만, 공주는 아버지 손에 죽고 호동도 모함을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백오십 년 가까이 고구려는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179년 아홉 번째 왕 고국천왕이 왕위에 올랐다.
등장인물
젊은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
키가 아홉 자였다고 한다
손수 밭을 갈던 사람
동부 사람
권세를 휘두른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의 나라 고구려. 좋은 밭이 드물어, 힘써 농사지어도 배불리 먹기 어려웠다.
집집마다 ‘부경’이라는 작은 창고를 두고, 먹을 것을 아꼈다.
큰 집안(대가·大家) 사람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 곡식과 생선, 소금을 져다 바쳤다.
해 지기 전에 다 날라야 해!
도치는 남의 일을 해 주고 곡식을 삯으로 받아,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그 무렵, 왕비의 친척 어비류와 좌가려가 나라의 권세를 쥐고 있었다.
좌가려 댁 것이다!
밭이옵니다!
그 집안 사람들은 세력을 믿고, 남의 밭과 집을 빼앗았다.
고국천왕은 키가 아홉 자에, 큰 솥을 들어 올릴 만큼 힘이 셌다고 한다.
백성을 괴롭히옵니다!
엄히 죄를 물으리라!
191년 여름 4월, 벌을 받게 된 좌가려 무리가 사람들을 모아 왕도를 쳤다.
왕은 도읍 가까이의 군사와 말을 불러 모아, 반란을 평정했다.
반란을 평정한 뒤, 왕이 말했다.
자리는 덕으로 오르지 않았다.
왕실까지 흔들었다.
“모두 과인이 밝지 못한 탓이다.” 왕은 자신을 탓했다.
고구려는 다섯 부(部)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왕은 그 가운데 네 부에 명했다.
너희 네 부는 저마다,
아랫자리에 묻혀 있는
어질고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라!
네 부는 입을 모아 동부의 안류를 천거했다. 왕은 그를 불러 나랏일을 맡기려 했다.
맡을 그릇이 못 되옵니다.
사람이 있사옵니다.
을파소라는 사람이옵니다.
손수 밭을 갈아 먹고 삽니다.
안류는 힘주어 아뢰었다.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신다면,
이 사람이 아니고는 아니 되옵니다.
왕은 겸손한 말과 두터운 예물을 갖추어 사자를 보냈다. 예물을 진 일꾼 가운데 도치도 있었다.
모셔 오라 하셨습니다.
애썼네.
왕은 을파소를 중외대부로 삼고 ‘우태’라는 작위를 더해 주며 말했다.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였소.
이는 나라와 백성의 복이오.
을파소는 나라를 위해 일할 뜻이 있었지만, 그 벼슬로는 일을 이룰 수 없다고 여겼다.
엄명을 감당하지 못하옵니다.
큰일을 이루소서.
나랏일을 맡기노라!
국상은 나랏일을 두루 맡아 보는 으뜸 벼슬이었다.
하루아침에 국상이라니.
임금에게서 떼어 놓는구먼.
조정의 신하들과 왕실의 친척들은 을파소를 시기했다.
그러자 왕이 명을 내렸다.
귀하든 천하든,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일족까지 벌하리라!
때를 만나면 나아가는 법이라네.
어찌 다시 숨어 살 생각을 하겠나.
을파소는 정성을 다해 나라를 받들었다.
다스림을 밝히고 상과 벌을 신중히 하니, 백성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조용했다.
그해 겨울 10월, 왕은 안류를 대사자로 삼으며 말했다.
그대의 한마디가 없었다면,
과인은 을파소를 얻지 못했을 것이오.
세 해가 흘렀다.
194년 가을 7월,
때 이른 서리가 내렸다.
없겠구먼.
곡식이 얼어 죽자 백성이 굶주렸다. 왕은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해 가을, 거둘 곡식이 없으니 품을 살 사람도 없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세요!
품꾼은 무슨!
부경은 텅 비었고, 곡식 한 되 구할 길이 없었다.
너나 먹어라.
194년 겨울 10월. 일거리를 찾아 먼 길을 헤매던 도치는, 질양 가는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날, 고국천왕이 질양으로 사냥을 나섰다.
어찌하여 우느냐?
늘 품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한 되 한 말 곡식도 얻을 길이 없어…
내가 백성의 어버이가 되어,
백성을 이 지경에 이르게 했구나.
왕은 그에게 옷과 먹을 것을 주어 위로했다.
왕은 나라 안팎의 관리들에게 명했다.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
늙고 병들고 가난해 스스로 살 수 없는 이들을
널리 찾아 돌보라!
나라 곡식을 내어,
겨울 10월에 갚게 하라.
법으로 삼으라!
나라 안팎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뻐했다.
관리들은 마을마다 다니며,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을 찾아 돌보았다.
이걸로 겨울을 나시오.
고맙습니다.
긴 겨울이 지나고,
이듬해 봄 3월.
나라의 창고 문이 열렸다.
관리들은 집집마다 식구 수를 헤아려 곡식을 빌려주었다.
두 식구 몫이오!
더 받는대요!
나라 곡식이냐?
갚으면 된대요!
그해 여름, 도치는 다시 남의 밭에서 품을 팔았다. 그리고 가을—
묵직해요!
겨울 10월, 빌린 곡식을 갚는 날.
다 가져왔습니다!
다 갚았소!
봄에 빌리고, 가을에 거두어, 겨울 10월에 갚는다.
가을 품삯으로 받은 곡식이 부경에 그득했다.
굶지 않겠구나.
창고 문이 열린대요.
이듬해 봄, 도치는 다시 빈 자루를 지고 창고로 향했다.
197년,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 난리를 피해 고구려로 온 한나라 사람이 매우 많았다.
그해 여름 5월,
고국천왕이 세상을 떠났다.
왕은 고국천원에 묻혔다. 그래서 그를 ‘고국천왕’이라 부른다.
을파소는 다음 왕 산상왕 때까지 국상으로 일하다가, 203년 가을에 세상을 떠났다. 나라 사람들은 목 놓아 울었다.
봄에 빌려주고 가을걷이 뒤에 거두어들인 이 법을, 훗날 사람들은 ‘진대법’이라 불렀다.
굶주린 백성을 나라가 돌본다는 그 뜻은
고려의 의창, 조선의 환곡으로 이어졌다.